농은 민안부
농은 민안부
농은 민안부 선생은 본관이 여흥으로 고려말 송경(지금의 개성)에서 살면서 예의판서를 지냈다.
이때 1375∼1388년(고려 32대 우왕)에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던 시기로 1388년 우왕은 최영을 팔도 도통사로 임명하고 우군 도통사에는 이성계, 좌군 도통사에는 조민수를 임명하여 명나라의 랴오둥을 정복하여 사기를 꺾어 놓고자 출정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성계는 압록강 가운데 있는 위화도에 이르렀을 때, 조민수를 구슬려 마침내 군대를 돌이키고 말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 이다 . 이성계 장군은 군대를 돌이켜 돌아와 실권을 잡아 1392년에 조선을 세웠다.
고려가 이렇게 망하고 보니, 많은 충신들은 이성계에 불복하므로 정몽주, 이색, 조민수, 권근 등이 귀양을 가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다른 충신들도 관복을 벗고 두문동으로 들어 갔다.
두문동이란 조선이 세워지자 이에 반대하던 고려의 신하들 72명이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에 들어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끝까지 지조를 지키면서 조선에 벼슬하지 않고 싸우다가 이성계로부터 죽임을 당한 곳이다.
이러한 곳인 두문동에 민안부 선생도 들어갔다가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에 물러났다.
그리하여 민안부 선생은 멀리 남쪽을 향해 이 고장 산청군 생초면 대포리 한계에까지 내려와 숨어 지내며, 산과 강을 벗삼아 농사를 짓고 스스로 위안하며 살았다.
또한, 그의 아들 민유도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벼슬하지 않았다.
그후 후손이 번영하였는데, 조선 500년간 산청 민씨의 시조가 되었다. 농은 민안부 선생의 절의와 지견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민안부 선생은 이 고장에 은둔하면서 고려의 왕실을 그리워하며, 생초면 대포리와 금서면 화계리에 걸쳐있는 왕산 중턱의 큰 바위까지 올라가 항상 고려의 옛 서울인 송경(현재의 개성)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
그 뒤, 큰 바위를 망경대라 부르게 되었으며, 후손들이 보호하고 있다. 그리고 후손들이 ‘대포향사’ 를 생초면 대포리에 세워 봄, 가을에 향사로서 그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