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이야기

목면시배유지

목면시배유지

“산청에 꽃핀 목화 한 송이”
목면시배유지 Sancheong Story

문익점 선생의 백성사랑

문익점은 가져온 목화씨 10개 중 목화씨 5개를 장인 정천익에게 주며 꼭 꽃을 피워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심은 목화씨는 다 죽고 말았다. 정천익이 심은 목화 가운데 오직 한 알만이 싹을 틔웠다. 문익점은 헐벗은 백성들을 생각하며 하늘에 빌었다. 꼭 성공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재배에 성공한 목화는 10여 년 만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우리나라 목화의 처음이 여기 산청이다.

목화씨에서 목화꽃, 목화꽃에서 무명까지
  • 산청군에서는 매년 목화를 재배한다. 목화꽃 피는 7~8월은 아름다운 목화꽃이 장관을 이룬다. 목화씨에서 무명베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씨아기 체험, 다듬이질 체험, 염색체험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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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 1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져온 목화씨

고려말엽 1360년 문익점은 과거에 급제했다. 그 후 3년 뒤인 1363년(공민왕12년) 좌정언으로 승진되어 그해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 문익점이 우연히 들판의 목화를 보고 무엇에 쓰이는지 물었더니 실을 뽑고 베를 짜서 옷을 해 입는다고 대답했다. 그때 문익점의 머리에는 목화가 고려 백성들의 의생활을 크게 개선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고려로 돌아올 때 문익점은 목화의 씨를 가져왔다.

이것이 고려에 목화가 처음 들어오는 과정이었다. 이렇게 고려로 돌아온 문익점은 목화재배의 부푼 꿈을 안고 고향으로 내려와 장인 정천익에게 가져온 열 톨의 씨 가운데 다섯 톨을 나누어 주며 심게 했으며 나머지는 자신이 직접 심었다. 조금이라도 성공률을 높여 보고자 분산 파종을 시도한 것이다.

# Story 2

살아남은 마지막 목화씨 하나가 꽃을 피우다

이렇게 심은 목화씨 중 문익점이 심은 것은 하나도 살지 못했고 정천익이 심은 다섯 톨의 씨도 네 톨이 죽고 한 톨만이 기적적으로 싹을 틔웠다. 당시만 해도 고려 사람들 대부분은 구멍 숭숭 뚫린 베옷을 몇 겹 씩 입으며 춥고 긴 겨울을 지내고 있었다. 문익점은 그 작은 씨 하나가 싹을 틔우고 살아 주기만 한다면 고려의 모든 백성이 따듯한 겨울을 맞이할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의 간절한 소원을 하늘이 들어주셨던 것일까. 싹을 틔운 목화는 꽃을 피우고 다래를 맺었다. 가을에 씨를 따니 백여 개가 되었다. 백 개의 씨가 이백 개가 되고 사백 개가 되었던 것이다. 몇 해를 그렇게 심어 목화재배에 성공한 문익점은 각 향리에 그 씨를 나누어 주고 목화재배를 장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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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 3

목화솜으로 무명베를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다

어는 날 중국의 스님 홍원이 이 고을을 지나가다가 밭에 핀 목화를 보고 “본토의 목화를 여기서 다시 보다니 정말 기쁘다.”며 눈물을 흘렸다. 정천익은 홍원을 극진히 대접하며 자신의 집에 며칠 동안 머물게 하면서 목화에서 실을 뽑고 베를 짜는 기술을 물었고 홍원은 그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게다가 홍원은 목화 재배의 방법은 물론 목화에서 솜을 따고 실을 만들고 베를 짜는 모든 과정의 기구들을 직접 만들어 주기까지 했다. 정천익은 집 여종에게 그 모든 과정을 해보게 시켰다. 여종은 배운 대로 베를 짜서 무명베 1필을 만들었다. 이것이 임금에게 진상한 우리나라 최초의 무명베 1필이었다. 문익점과 정천익은 이 사실을 이웃마을에 알려 목화 재배는 물론 생활에 목화가 어떻게 쓰이는가를 설명하며 점차 재배지를 넓혀갔다. 그러기를 10년, 비로소 목화 재배지가 전국으로 퍼지게 됐다.

문익점은 1398년 고향에서 숨을 거두었다. 조선 태종은 ‘충선’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세종은 영의정으로 추서하고 강성군으로 봉하였으며 부민후로 추봉하였다. 1965년 정부는 그의 고향인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목화를 처음 재배한 터를 국가사적 제108호로 지정하고 1997년 목면시배유지를 건립하여 전시실과 사적비, 효자비, 목화밭 등을 갖추고 삼우당 문익점 선생의 애민정신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