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이태의 낙반비벽토
유이태의 낙반비벽토
조선 숙종 때의 사람인 유이태(劉以泰)의 자는 백원이요 호는 신연당(新淵堂)
으로서 문양공 유전(劉筌)의 후손이다. 일찍이 거창군 위천면에서 태어나 남다른 재주와 총명을 갖고 의학에 통달하였다. 뒤에 산청군 생초면 신연리에 옮겨 살았는데 천하의 명의로 이름이 나자 생초면 신연리 본댁으로 나라에서 급히 연락이 왔다. 청나라 고종이 중병을 앓게 되어 조선의 명의 유이태를 찾는다는 것이다. 이에 두 달의 기한으로 청나라로 왕진을 가게 되었다. 불편하였던 그 당시의 교통사정으로 겨우 청나라에 이르러 고종의 병을 진맥하여 보니 천문창(天門瘡)이라고 하는 두창이었다. 이 병은 “남등창 여발저”라고 하여 당시의 의술로서는 좀처럼 고치기 어려운 부스럼의 일종이었다. 더구나 청나라 안의 이름 있는 명의는 거의 불러서 오랫동안 시들었던 병이라 난처하였다. 진맥을 마치고 객관에 나와서 깊이 생각해보았으나 머리만 점점 무거워 질 뿐 별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럭저럭 하룻밤을 지새고 아침 밥상을 대하여 첫술을 드는데 이상하게도 밥숟가락이 뒤집혀 상 밑으로 밥이 쏟아져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쓴 입맛에 이렇게 되니 식욕이 날 리가 없었다. 그냥 밥상을 밀쳐두고 깊이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착상 한 가지가 있어 쏟아진 밥풀을 거두고 남은 밥을 모두 합쳐서 객관의 벽에 대고 문질러서 발랐다. 자연히 벽에 붙어있는 때와 함께 혼합이 되었다. 그러고는 차일피일 시일을 보내고 있었는데 크게 기대를 걸고 초청한 조선의 명의가 별다른 처방도 없이 시일만 보내고 있으니 고종의 독촉은 성화같았다. 뿐만 아니라 측근에선 무능한 의원이라 하여 논란이 분분하였다. 이럭저럭 한 달을 지내고 나니 더 이상 지체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때 유이태 의원은 객관의 벽에 발라 두었던 밥풀을 긁어서 모아 깨끗하게 가루를 만들었다. 이튿날 그 가루를 갖고 궁궐에 들어가서 고종의 헐어진 환부에 넣어 주었다. 다시 하룻밤을 자고 들어가 보니 그렇게 오래된 부스럼이 물기가 가셔지고 차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수일 동안을 계속함에 따라 환부는 아물어들어 남은 한달이 다 되기도 전에 두창은 완치가 되었다. 이로써 고종은 말할 것도 없고 청나라의 온 조정이 떠들썩하게 유이태 의원을 받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달의 말미도 다 되어 고국으로 돌아 갈 것을 말하니 청 고종은 만만치하를 아끼지 않으면서 생명의 은인인 유이태 의원에게 평생을 두고 품어온 큰 소원 한 가지를 물었다. 이에 유이태 의원은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고 하니 고종이 자기의 뜻을 사양하지 말고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하므로 할 수 없이 소원을 말하였는데 “옛부터 가산이 넉넉지 못하여 선대의 산소에 석물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이 염원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청 고종이 “조상을 추모하는 정신이 갸륵하다”고 말하면서 “그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이니 염려말고 돌아가라”고 하며 후하게 환송하여 무사히 귀국하였다. 곧 이어서 청나라 조정에서 서둘러 3대 양위의 묘소에 석물을 갖추어 주었는데 지금도 그 석물이 그대로 전하여 오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는 후로 “낙반비벽토(落飯庇壁土)”의 이야기는 이 고장에 널리 전파되었는데 그 약효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화제가 무성하였다. 벽에다 밥풀을 발랐으니 곰팡이가 슬었을 것이고 그 곰팡이는 지금의 “페니실린”처럼 항균제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종기에 효과가 있었지 않았겠느냐 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면 페니실린보다 몇 세기 앞선 발명이 아닌가 생각되어 그 깊은 방술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한다.
* 선비의 고장 산청의 명소와 이야기(현대문예, 손성모지음, 2000, p223~225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