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경 남명조식유적지
남명의 경의 사상을 되새겨보는
남명조식유적지
조선시대 실천유학의 대가인 남명 조식선생은
영남학파의 거목으로 선비의 고장인 산청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조선 명종에게 어진 정치를 바라는 을묘 단성소를 올린 참 유학자로
그의 시조 두류산 양단수에 나오는 지리산 자락 입구인 시천면 덕천강변 일대에 산천재, 덕천서원, 남명기념관, 세심정, 묘소, 여재실 등의 유적이 있다.
봄이면 산천재에서 선생이 손수 심은 남명매의 그윽한 향기가 남명의 경의사상과 선비정신을 일깨운다.
(사적 제305호)
조선 중기의 유명한 유학자인 남명 조식의 유적이다. 조식 선생은 많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거절하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평생을 보냈다.
이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絲里)에는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院里)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에 세웠고, 앞면 5칸, 옆면 2칸의 현재 건물은 1926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세심정은 선조 15년(1582)에 처음 세웠다. 조식유적은 조선중기의 위대한 유현(儒賢)이며 뛰어난 실천(實踐) 도학자(道學者)였던 남명선생(南冥先生)이
만년에 강학(講學)하던 산천재(山天齋)를 비롯하여 사후 그를 모시던 덕천서원(德川書院) 등을 일괄 지정한 유적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燕山君 7년 1501∼선조(宣祖) 5년, 자건중(字楗仲), 별호산해(別號山海), 본관 창녕(本貫昌寧))은 남다른 재질과 용공(用工)(절제(節制))으로
일찍부터 학덕(學德)을 갖추어 대성(大成)하였으나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고, 평생동안 선비와 처사(處士)(산림(山林))로서 굳건히 일관하였다.
38세 때 헌릉 참봉(獻陵參奉)을 시작으로 여러 번 벼슬이 내려지고 왕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매번 상소(上疏)로써 의견을 전하였을 뿐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66세(명종(明宗) 21, 1566) 되던 해 10월 초에 상경하여 왕을 잠시 뵈옵고는 곧 귀향하였다.
사후 광해군(光海君) 7년(1615)에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주소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