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이야기

겁외사(성철스님생가)

겁외사 (성철스님생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성철스님 동상 Sancheong Story

성철스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중이 안 되면 내가 죽을 것 같습니다." 한 가정의 장남이자 가장이었던 성철스님은 출가를 결심했다. 인연의 사슬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찾는 수행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눕지 않고 면벽수도 하는 ‘장좌불와’ 8년, 토굴 수행 10년 등 끊임없는 수련과 정진의 길을 걸었던 성철스님은 이웃에게 기쁜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라는 새해 법문을 남기고 1993년 입적했다. 그가 태어난 생가에 겁외사가 세워졌다.

겁외사(성철스님 생가)에서 꼭 봐야할 것들
  • 겁외사의 단청 : 색이 강렬하면서도 화려하다.
  • 염주모양의 조형물 : 이 조형물 사이로 성철스님 동상이 보이는 구도로 사진 찍은 사람들이 많다.
  • 묵곡생태숲 : 넓은 부지 내 다양한 수목들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 성철스님순례길 : 겁외사에서 신안면 강변까지 이어지는 1시간 정도 거리의 산책로다.
    한편으로는 강이 흘러가고 반대편으로는 대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이 인상적이다.
겁외사
# Story 1

인생을 바꿔놓은 책 "증도가"

성철스님은 1912년 4월 10일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총명했던 스님은 크면서 책을 많이 보기로 유명했다. 열반 뒤에 발견된 '서적기'를 보면 어떤 책을 읽었는지 알 수 있는데 스무살 나이에 행복론,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역사철학, 남화경, 소학, 대학, 하이네 시집, 기독교의 신구약성서 등을 섭렵했다.
묵곡리에 대숲과 밤나무숲이 있었는데 스님은 이 숲을 찾아 책 읽기를 즐겼다. 스님이 책을 읽으면서 적은 낙서 중 한 구절이 '영원에서 영원으로'라는 글인데 이때부터 '영원'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정립하고 해답을 찾기 위해 고민한 듯 보인다.

그러던 중 성철스님은 우연히 어떤 스님에게서 영가 대사의 [증도가]를 얻어서 읽게 되는 데 이 한 권의 책이 스님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스님은 스스로 그 책을 읽는 순간 마치 캄캄한 밤중에 밝은 횃불을 만난 듯했다고 적고 있다.

맏아들이자 가정까지 이룬 성철스님이 스님이 되겠다고 하자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와 아내를 끝까지 설득, 결국 출가하게 됐다. 인연의 사슬에서 벗어나 '참자유'를 찾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처음 찾아간 절은 지리산 대원사였다.

# Story 2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오도송을 읊다

탑전은 가정을 꾸린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그곳에 자리를 깔고 수행에 들어간 것은 불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집념을 꺾을 수 없었다. 대원사 주지스님의 배려로 그곳에 머무를 수 있었다. 스님은 그때부터 스스로 참선의 길로 정진했다. 해인사에 있던 동산 스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성철스님을 해인사로 불러 출가를 허락했다. 머리를 깎고 출가하면서 '성철'이라는 법명을 얻게 된 것이다.

남다른 정진 수행을 하던 스님은 동화사 금당선원에 이르러 깨달음을 얻고 오도송을 읊게 된다.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해와 달은 빛을 잃고/땅은 꺼져내리도다./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청산은 예대로 흰 구름 속에 섰네.]

그 뒤 성철스님은 "먼저 깨달은 뒤에 닦는다."고 한 '돈오점수'와는 다른 "깨달음이 이루어지면 닦음도 단박에 이루어진다."는 '돈오돈수'를 이야기 했다.

성철스님 동상2
# Story 3

남모르게 남을 도우라

스스로를 낮추고 마음의 때를 씻어 내는 과정으로 스님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삼천배'를 시켰다. 삼천 번 절을 하는 동안 느끼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 '참다운 나'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에 취임을 하면서 성철스님이 남긴 법문은 열반한 이후에 세상 사람들의 가슴에 아직까지 남아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그 전문을 옮겨 보면 이렇다.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시회대중은 알겠는가?/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성철스님은 1993년 새해에 '이웃에게 기쁜 마음으로 자비를'이라는 법문을 남겼고, 같은 해 법랍 59년, 세수82세로 '열반송'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둥근 수레바퀴 붉은 빛 토하고/푸른 산에 걸렸도다.]

서른 시간이 넘게 걸린 다비는 일백여 과에 이르는 사리를 남겼다. 사리는 겁외사(성철스님 생가)에 서 있는 성철스님 동상 아래 기단과 해인사 사리탑에 모셨다. 스님이 남긴 말이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마음을 울린다.

[자기를 바로 보라/남을 위해 기도하라./남 모르게 남을 도우라/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참회하고/일체 중생이 행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 Story 4

성철 스님이 태어난 묵곡마을 대숲은 일렁이고

1998년 조계종 해인사 문도회와 산청군은 성철대종사 열반 5주기를 맞이하여 생가를 복원하면서 성철스님기념관을 세워 수행의 정신과 그 가르침을 기리고 겁외사를 건립하여 종교를 뛰어넘는 선 수행, 가르침, 포교의 공간을 조성코자 했다. 그리하여 2001년 3월 30일 문을 열었다.
생가 겁외사(劫外寺)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장소'이라는 뜻이다. 또한 '겁외'라는 의미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완전한 천상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따라서 '겁외사'는 '유토피아'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겁외사 입구에 기둥 18개가 받치고 있는 커다란 누각을 세웠는데, 건물 뒷면에는 '벽해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벽해루'라는 이름은 스님이 평소 즐겨 얘기하던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 아침의 붉은 해가 푸른 바다를 뚫고 솟아오른다는 뜻)'라는 문구에서 따서 지은 것이다.

겁외사는 대웅전과 선방, 누각, 요사채 등이 부속 건물로 있으며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성철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성철스님 동상 뒤에는 2000년 10월 복원한 성철스님 생가가 있다. 성철대종사의 선친 율은 이상언 옹의 호를 따 '율은고거'로 이름 붙였다. 생가는 크게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된다. 포영당에는 성철스님이 평소 입었던 두루마기와 고무신, 장삼, 지팡이를 비롯하여 평소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소장 도서와 메모지, 유필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산을 등지고 강을 앞에 둔 묵곡마을에서 성철스님은 태어났다. '대나무로 1000냥을 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마을에는 대나무가 유명한데, 그만큼 대숲이 우거졌다.
성철스님이 속인으로 살 때 책을 읽었다고 전해지는 이 마을 대숲은 여전히 그자리에서 겁외사(성철스님 생가)를 방문하는 여행자를 반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