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탐방

신연당 유이태

산청지역의 인물

신연당 유이태

신연당 유이태

유이태(劉以泰) 선생은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의원이자, 산청을 대표하는 의학 인물이자 영남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경남 산청군 생초면 출신이다.

자는 백원(伯源), 호는 신연당(新淵堂), 원학산인(猿鶴山人), 인서(麟西),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유이태 선생은 죽었던 사람을 살렸던 신의(神醫), 환자가 의원을 따르게 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치료하는 심의(心醫)로 불려진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의원으로서 영남을 대표하는 조선의 선비 의사로서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라는 책에 수록된 영남인 56인의 1인이고, 영호남을 대표하는 조선의 의원이며, <조선의 명의들>이라는 책에 조선의 8인의 명의(名醫)의 1인으로 수록된 의원으로 조선의 의학 사상가이며. 경상도 산음의 빈민 구제가(救濟家)이다.

1652년에 태어난 유이태 선생은 어린 시절에 자신이 앓고 있던 고질병을 혼자서 의서를 읽고 고친 후 입신양명의 뜻을 접고 의학에 입문하였다. 사람은 평등하므로 조선의 백성을 치료하기 위해 의학에 입문하였다. 3년 만에 의술이 통달하여 의원이 된 후 산음과 인근 고을, 그리고 영호남의 환자들을 치료하였고, 30세에 명의(名醫)의 명성을 얻어 이름이 궁궐과 조선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승정원일기에 유이태 선생은 영호남을 대표하는 명의로 기록되어 있다.

신연당 유이태

유이태 선생은 1710년과 1713년 임금 숙종의 환후가 발생하자 나라로부터 두 번의 부름을 받았다. 어의가 된 유이태 선생은 임금의 병을 고친 공로로 숭록대부 품계를 받았고, 경기도 안산 군수에 제수되었다.

1600년 초반 조선에 처음으로 발생한 홍역은 치료법이 없어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1668년, 1680년, 1692년 조선 전국에 홍역이 창궐하자 유이태 선생은 홍역 치료에 나섰고, 전염병 홍역 치료 태두로서 홍역을 치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인 최초로 홍역 치료 전문 의서 <마진편>을 남겼다. 향의로서 40년간 환자를 치료하면서 기록한 경험방 <인서문견록>, <실험단방>, 1975년 드라마 <집념> 방영 때 대학교수라는 분이 가져간 <의서 2권>, 1940년대 종손 집 사랑채 화재로 소실된 <침구방>, <부인방> 등 7권의 의서를 저술했고, 유품으로 <유이태유고>, <예조정장>, <정영장>과 <간찰>을 남겼다.

신연당 유이태

유이태 선생은 부모를 공경히 모시는 효도(孝道), 가진 재산을 나누어 주는 시도(施道), 바른길을 걷는 정도(正道), 재물을 탐하지 않고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치료하는 의도(醫道), 건강하게 장수하는 수도(壽道) 등 5도(道)를 실천했다. 모든 백성은 평등하며, 질병 없는 세상을 열고자 일생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귀천(貴賤)과 친소(親疏), 빈부(貧富)와 민관(民官)을 차별하지 않고 환자(患者)만을 치료했다. 유이태 선생은 유학자 의원으로 조선의 유의(儒醫) 전범(典範)을 제시했고, 질병 예방을 주창했으며, 경험 치료를 중시하였고, 의학의 발달과 윤리 도덕을 확립했다.

  • 유이태 선생의 의학사상을 인생관, 정신관, 수기관, 학문관, 치병관, 의약관으로 살펴볼 수 있다.
  • 인생관은 ‘사친지의(事親知醫), 제중인심(濟衆仁心)’으로 어버이를 공경하기 위해 반드시 의학을 알아야 하며, 자손들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먼저 돌보아 질병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 정신관은 ‘무귀무천(無貴無賤), 무친무소(無親無踈)’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귀천과 친소, 빈부와 민관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백성을 보살피며 사랑하는 위민(爲民)·애민(愛民) 정신을 펼치는 것이었다.
  • 수기관은 ‘존양천리(存養践履), 성실불구(誠實不苟)’로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여 편안하게 하고 본심을 잃지 않고 의로운 일을 변함없이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이었다.
  • 학문관은 ‘공리후세(功利後世), 보상일신(補償日新)’으로 후세에 공(功)과 혜택을 넘기고 후학들이 새로운 치료법을 만들어 의학이 날마다 발전하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 치병관은 ‘미병절선(未病節宣), 선조후치(先調後治)’로 건강할 때 절제하는 생활로 병을 예방하고, 발병하면 근원을 찾아서 신속히 치료하며, 완치 후에는 철저히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의약관은 ‘향정비약(鄕井備藥), 단방수록(單方隨錄)’로 자연환경에서 구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향약재를 이용한 치료법을 개발·채록하고, 치료한 경험 사례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함으로써 전통적인 향약 의학의 성격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신연당 유이태

생전과 사후의 백성들, 그리고 유이태 선생으로부터 병 치료를 받은 환자들은 중국의 전설적인 명의 화타와 편작, 현대에 와서는 의학의 발달과 윤리 도덕을 실천한 서양의 히포크라테스에 비유되었고,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구비문학대계(韓國口碑文學大系)』에 채록된 유이태 설화는 조선의 명의 중에서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고, 명의 설화의 백미 설화인 ‘유이태탕’, ‘순산비방’ 등 여러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